▒ ▒ ▒ ▒      김오성 작품세계      ▒ ▒ ▒ ▒


---신항섭(미술평론가)---………p1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조각은 한층 심화되는데, 1991년 경기도 고양군 대자리를 떠나 변산반도에 위치한 ‘금구원 조각공원’으로 작업장을 옮긴 이후의 안정된 생활과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금구원 조각공원’은 1966년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에 위치한 부친의 농장 ‘금구원’에 자신의 작품을 가져다 놓으면서 시작되었다. 조각공원으로는 한국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변산반도의 생활은 그에게 긴 의지생활을 끝내고 비로소 가족의 연대감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쁨을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금구원’에 천문대가 있는 집을 신축하고 넓은 작업장도 확보했다. 조각공원을 꿈꾸며 한두 점 작품을 가져다 놓기 시작한 이래 작품 숫자가 늘어 조각공원으로서의 면모가 갖추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농민운동을 실천한 부친이 3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 가꾼 농장은 조각공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그 기초가 되었다. 변산반도의 생활은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은 이상으로 여겨온 그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음은 물론이다. 작업 이외의 시간에는 낚시도 아니고 밤에는 천문대를 지키며 별의 운행은 관찰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생활은 그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었고 세상에 대한 시야를 한껏 넓혀 주었다. 무엇보다도 망원경을 통해 우주로까지 시야를 넓힘으로써 사유의 공간이 크게 확장될 수 있었다. 우주를 향한 시야의 확대는 삶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시각은 갖추는데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형상을 재현하는 손의 기능을 이미 완성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이치를 관통하는 지혜의 눈이다. 따라서 자연을 통해 생명의 이치, 그 섭리를 터득하고 우주라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통해 자신을 보다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일이야말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이처럼 예술가로서의 삶에 긴요한 것을 변산반도의 생활에서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90년대 후반기의 작업에 반영되고 있다. 그렇다. 최근 작업을 보면 그대로 자연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
여체에서 자연을 본다는 것은 얼른 이해하기 힘든 얘기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여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기 어렵지 않다. 단지 여체로서만 있을 뿐인데도 거기에서는 자연의 향기가 풍긴다. 그 자연의 행기가 시각적으로 명확히 인지되는 어떠한 실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의 작품과 마주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안목에 의해 감지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포되는 것이다.
이전의 작업에서도 자연의 향기가 스며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미적 가치는 자연미에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자연미는 그의 일관된 조형의 목표이다.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정서가 바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이었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체를 바라본다는 것이 그의 예술관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은 조각을 위한 포즈를 지양한다. 그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써 이상적인 포즈를 얻어낸다. 하지만 작업과정에서 모델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모델은 거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협력자인 것이다. 모델은 그 자신의 내부에서 싹트는 표상을 밖으로 드러내 실체화 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옷과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포즈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작품의 구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델링이 필요하다. 모델링은 역시 실제의 모델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아무리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포즈의 변화에 따른 이체의 미묘한 움직임을 이끄는 감정의 흐름까지 창작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특히 그의 작업과 같이 내적인 울림을 중요시하는 경우 모델링을 통해 인체의 언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작품은 현의 떨림과도 같은 미세한 감정을 밖으로 내보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의 작품과 마주했을 때 전적으로 시지각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사실을 작품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단지 아름다운 형상일 뿐이라는 단순한 시각에 사로잡힐 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여체의 아름다운 곡선 밑 볼륨으로 빚어진 사실적인 조각으로서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히 감상자의 시선을 현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형상 안쪽에 자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형적인 힘은 내적인 울림, 즉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정서에 있다.
그의 작품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주 찬찬히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그 내부에 가득 찬 아름다움의 향기를 외부로 실어 나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거기에서 그가 추구하는 조각의 언어와 만나게 된다. 그의 조각은 달이 지면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풀잎이 눕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한다. 인체 또한 풀들과 다름없는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그의 작업은 그래서 어떠한 포즈이던 간에 순연한 흐름을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