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김오성 작품세계      ▒ ▒ ▒ ▒


---신항섭(미술평론가)---………p2
자연에 익숙한 시선을 거스르지 않는 다는 생각으로 작업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을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고향과 같은 포근함이 배어 있다.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지만 거기에서는 우리의 누나와 같은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막연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아마도 조각 스스로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 묻지 않은 이미지 속에는 순결, 순수, 순박, 순정 등의 정서가 그윽하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그리움은 바로 이러한 정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의 삶 속에서 상실하고 있는 자연의 순수함을 조각이라는 언어를 통해 이상화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상으로 여기는 조각의 힘은 자연미에 있는 것이다. 작품의 포즈는 한결같이 일상적인 삶의 한순간을 정지시켜 놓은 듯 자연스럽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닭에 한편으로는 조각과 실제의 경계가 어디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무릇 형의 세계란 자연의 모방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작업에서는 동세가 커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는 리얼리티를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는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경도가 낮은 이태리 대리석의 경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동체에서 멀리 떨어지는 팔 등의 파손될 위험성은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은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가 주는 시각적인 쾌감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작가 자신에게는 상대적으로 힘든 작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난이도가 놓은 작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자연미를 얻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인 까닭이다.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의문은 여체를 다루고 있음에도 에로틱한 이미지를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적인 자극을 유도하는 젖가슴의 크기가 평균이하라는 사실에 있다. 신체에 비해서 축소되고 있는 듯 한 인상의 작은 젖가슴은 시선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젖가슴이 커지면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자연미는 후퇴하게 된다.
시선이 젖가슴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뿐더러 전체적인 비례에서도 안정감이 깨지게 될 것이다. 여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어느 작품이나 순수함에 이끌리는 것은 작업과정에서 정적인 매력을 부각시킨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니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누이를 보는 듯 한 일상적인 감정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의 조각은 어느 특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이상화된 여성상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모델은 포즈의 실제화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세부적인 수식을 생략하는 것은 불특정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모든 작품은 하나같이 계란형의 얼굴 형태를 보여준다. 가슴의 크기도 작품마다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육체의 전체적인 비례 역시 작품마다 거의 비슷하다. 신체의 골격이나 볼륨 또한 그러하다. 마치 하나의 모범답안을 놓고 작업하는 것 같다. 그렇다. 그에게 여체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상적인 풍경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여체 조각에서 서정적인 정경을 연상하는 것도 자연미를 바탕으로 하는 영원성 무한성을 지향하기 때문이 아닐까.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한시적인 삶을 사는 지상의 인물과는 다른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다.
풍요로운 결실의 기쁨으로 넘치는 들녘의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한 감상을 유도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그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 아래 아득한 지평선 끝에서 누군가 바삐 오고 있는 정경이 연상되기도 한다. 특히 어느 한 곳이 고정되지 않는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공간을 떠나 영원한 세계를 꿈꾸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지상의 어느 곳에 시선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끝닿을 데 없는 아주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 한 눈은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마음속으로 시를 읊조리고, 아름다운 음조에 귀 기울이며, 이상향을 응시하는 듯한 그 단아하고 간명한 인상의 포즈는 차라리 슬픔이라고 해야 마땅한지 모른다. 아름다움이 지극하면 끝내는 슬픔이 되는 예술의 실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조각에는 현의 음률이 내재한다. 귀로는 들을 수 없되 가슴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조각의 힘이자 생명이 아닌가. 크게 울리지 않아도 능히 사람의 가슴속에 흥건한 그리움과 슬픔을 남겨둘 수 있는 그런 현의 떨림이 거기에 있다. 그의 조각이 가지고 있는 진면목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더듬어 읽어야만 하는데 있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