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조각가 김오성의 인체조각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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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시인, 수필가)---………p1 | |
조각가의 손은 어떻게 생겼을까? 얼굴보다 그 손이 궁금하다. 어느 날, 김오성 조각가를 만나면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아보았다. 그의 두 손은 돌 조각의 창작도구, 비교적 작은 손이지만 밥이 도탑고 뼈가 유연하게 움직여줄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차고 거칠고 딱딱한 돌을 쪼고 갈고 다듬는 그의 손은 장난꾸러기 어린이 손 같았다. 인간에게 위대한 능력을 부가한 손, 특히 예술가의 손의 능력은 경이롭고 산바하다. 악기 연주가의 손은 섬세한 율동의 손길이요 화가의 손은 빛을 조율하는 정직의 손이요 문인의 손은 지정의를 길어 올리는 근면의 손이지 않은가. 특히 조각가의 손은 무정에 유정을 심는 손이라고 생각한다. 석조 곧 돌 조각은 돌에 감정을 표출하는, 손으로 조형하는 활동이다. 돌과 조각가의 뜻이 통하지 않으면 실패작이 되기 쉽다. 돌의 기존 공간을 부수고 깍아내어 작품에 필요한 절대 공간만을 남기는 작업이므로 철저한 계산과 집중 없이는 작가의 표상을 조각해 낼 수 없다. 조각가의 미의식과 행위가 엄격히 제한되는 작업이며 어떤 예술행위보다 표상을 정확히 만드는 묘사 기술 능력이 필요한 예술이다. 얼마나 집중하고 연마해야 돌에 미의식을 심을 수 있게 될까. 김오성은 인체 석조 또는 인물 석조를 전문으로 창작하는 조각가다. 동체의 표현 곧 볼륨, 동체감, 생명력, 세부 묘사에 충실하다. 자연을 참되게 이해하는 작가의 미의식 덕분인지 감상자들 대부분 그의 조각품에 쉬이 공감한다. 어언 반세기를 돌과의 대화에 전념한 김오성, 그 손의 기능이 자유를 얻을 만큼 돌을 저미는 데 시간을 바쳤다고 할까. 예술가의 재능은 숙련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넘고 엄어 그의 사상과 철학을 예술적 가치로 형상화하는 데 도달한 것이다. 그가 조탁한 여체 조각은 담채화처럼 고요하다. 여체의 장점인 볼륨과 수줍음을 담고 있어 교만하거나 웅장하고 압도하는 불편함이 없다. 또 관능미를 과장하지 않으니 천박함이 없다. 어찌 그의 작품에는 미적 과장이나 흥분 같은 게 없을까? 그의 석조는 사실적 기법으로 조각되어 운동감이 억제되고 정적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한국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까. 잔잔하고 평범한 휴머니티의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균형미나 비례를 따지지 않은 듯 한 자연스러움이 완성미를 느끼게 하며 누구나 공감하게 한다. 특징이 없는, 누구나의 어머니 같고 아내 같고 누이 같은 보통 여인을 느낄 수 있으므로 편안한 것이다. 그의 여인상에선 어떤 머뭇거림이나 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평정한 마음으로 조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조각 표면의 음영 곧 조각의 예술성은 명확한 형상과 그 형상의 굴곡에서 발산되는 미묘한 빛의 파장에서 조각의 감정이 전달되는데, 그것이 감상자와 소통하는 비결이다. 그는 조각을 산문적으로 설명하는게 아니라 운문적으로 내보인다고 할까.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의도적인 작품이 없다. 여체를 조각하지만 어떤 여자에게도 미혹된 적이 없는 듯하다. 그의 내면 깊숙이에서 홀로 성숙한 여인을 오직 매제媒制인 돌에 마감과 예술적 사려를 다해 조형헤낸 여체에 빠져 있을 뿐이다. 조각해내는 동안의 소음은 그의 넋두리요 쓴 소리 잡소리 단 소리였을 것이다. 상당한 독서량을 지닌 그의 지식 상식 사고가 돌조각에 숨은 것 같다. 그의 조각은 말이 없고 적막하다. 오직 천지 자연을 홀로 바라보듯이 존재한다. 그러하니 그의 조각을 바라볼 때에는 가슴과 두뇌를 함께 움직여 보아야 그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석조상의, 침묵해야 하는 슬픔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갇힌 아름다움의 비애 같은 것을. 김오성 개인의 조각공원인 '금구원'의 조각들은 별로 극단적이거나 도발적이거나 현대적이지 않다. 미술관 277호인 금구원에는 야외에 90여점, 실내 전시관에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대부분인 인체조각이다. 그 점이 금구원의 장점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은 인간의 모습이고 어머니가 사람을 생산하여 인류를 존속시키듯이 근원적인 예술정신도 보전되려면 자연의 추구심이 제일일 것이다. 자연중의 최고의 자연은 인간이며 그 중에 여자 아니겠는가. 오직 인간만이 창조하고 감상할 수 있다는 어떤 예술도, 인간과 인간미의 추구가 최고 덕목이며 그것만이 예술의 영원성을 획득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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