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공원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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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관광부 등록 사립박물관 277호
  • 파리 세계박물관 협회(International of museums)에 개인회원으로 등록(등록번호 41611kr)
금구원 조각공원의 설립 배경은 조각가 김오성의 개인작품을 야외에 전시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성장되어 왔으며, 그 토대는 부친 김병렬(농촌개척자, 농민교육자, 1963년 대통령상금탑산업훈장, 1964년 제5회 3 ·1문화상 수상)씨가 농민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숲을 개척하고 금구원 농장을 세운 1966년부터 이루어졌다.

뒷날 농민학교는 무산되었으나 조각공원은 성장을 계속하여 1980년대에는 상당한 관람객이 방문하였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전라북도에서 전주로 조각공원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그냥 남아있었다.

초기에 심고 가꾸던 나무들이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 숲이 되어 매우 번창한 듯 했으나, 1998년 9월말에 발생한 태풍 '애니'호의 피해를 받아 대부분의 큰 나무인 편백나무와 히말라야시다나무들이 모두 쓰러지고 꺾여 하루아침에 초토화되었다.

아름다운 숲은 없어졌지만 그 밑에서 자라던 동백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살아남아 몇 년 사이 잘 자라주어 조각작품을 감싸주는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산간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국가의 발전과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 또 사회의 관심에 힘입어 금구원 조각공원은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이 곳에서는 조각작품 감상뿐만 아니라 조각가 김오성의 창작 생활공간과 만날 수 있고, 한국 개인 천문대 1호인 금구원 조각공원 천문대에서 우주에 대한 꿈을 꾸며 밤낮으로 예술과 과학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야외 조각공원 및 소품전시실에 조각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야외소극장, 금구원 천문대, 여러 시인들의 금구원에 대한 헌시를 돌에 새긴 시비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리실 겸 주거주택이 공원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연못 3개소, 등나무 돌기둥 선반을 중심으로 특히 많은 호랑가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호랑가시나무는 천연기념물 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한 나무이며, 이 곳에 있는 것은 인공육묘된 것이어서 천연 기념물은 아니다) 동백과 편백나무, 참대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조각공원은 약 1만 평방미터이며 인접한 4만 평방미터의 군유지에 대한 감수권이 있어서 간접적인 활용을 할 수 있다.

이 곳의 위치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이 있는 변산반도 끝 부분에 위치하여, 조각공원으로부터 채석강·격포까지는 서쪽으로 3.5km(직선거리 1km), 변산해수욕장까지는 북쪽으로 9km, 새만금 방조제까지는 13km, 내소사까지는 동쪽으로 15km, 띄목(모항)까지는 동남쪽으로 9km, 상록해수욕장까지는 남쪽으로 4km, 그리고 고사포해수욕장까지 북쪽으로 6km가 되는 지점에 있다. 그리고 30번 국도(대구시에서 거창 장수 정읍을 지나 부안-변산, 영전까지 이어진다.)는 북쪽으로 2.3km, 남쪽으로 1.5km 끝에서 만난다. 이 곳의 고도는 해발 35∼45m 정도이다.

이 곳은 1970년대 초『저 높은 곳에 초원을 - 산악농의 개척자. 김병렬』(노벨문화사) 서적에 약간의 기록이 있고 1980년대부터 TV 등 많은 언론매체들의 취재 보도에 힘입어 사회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6년『여성동아』12월 호에 금구원 조각공원이 한국 조각공원의 효시라고 인정하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기사화하였다. 1987년 대한뉴스 1644호(국립영화제작소), 1992년 대한뉴스 1897호(국립영화제작소) 등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금구원조각공원은 1966년부터 금구원 농장에서 관리하여 오다가 1991년 조각가 김오성이 서울에서 귀향하여 작품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다.

더 많은 예술 애호가 및 국민관광을 위한 훌륭한 미술관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3년 7월 29일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등록 사립박물관 제277호)에 소정의 절차를 거쳐 국가에서 정하는 법률에 따라 미술관으로 등록되었고 이 곳 조각공원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전경